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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지방보훈청 보훈창고

탐방단원 김정애

오방최흥종기념관

*탐방일 :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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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최흥종기념관

 

최흥종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나병환자를 위한 사회운동을 전개한 사회운동가이다

18815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5세일 때 친모가 사망하고 19세에 부친이 사망하는 어린시절이었으나 선교사였던 유진 벨 선교사에게 1907년 세례를 받아 최흥종으로 개명하고 목사가 되었다. 광주군 경무청의 순검이 되는등 공직생활을 지냈다. 이 시절 많은 의병들을 몰래 석방해주는등 의병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대한제국때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40전을 기부하는등 다양한 사회활동에서 활약을 펼쳤다.

일제 감정기 시절에는 광주제중원에서 근무하였고 1912년 나환자교회인 봉선리 교회의 설립에 참여하고 북문안교회의 장로가 되는등 독실한 기독인으로써의 삶을 살았다.

19193.1 운동에 참여하여 남대문 역전에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연설하고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는등의 독립운동가로써의 모습을 남겼다.

형기가 끝난 후 북문밖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19219월에는 광주청년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19213월 시베리아 선교를 다녀오는등 선교사로써 사회복지와 민족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많은 사회단체의 일원으로써 소작인, 나병인등을 돕는 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분열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간의 갈등을 중재하며 1927년 신간회 광주지회 임시의장, 1대 지회장으로써 활동했다.

제주도에 목사로써 활동하고 다양한 구제 활동을 위해 모금운동을 펼치는 등 사회운동을 이끌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371<사망통지서>를 지인들에게 발송해 모든 외부 활동의 중단을 선언하여 기성교단에 교역자들의 부패를 비난하고 평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하였고 무등산에 들어가 병자, 빈민을 위한 사회운동에 전념하였다.

광복이후 1945816일 전남건국 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나 활동은 단 17일뿐이었다. 194511월에는 미군정으로부터 제1회 도지사고문회 회장으로 선임되고 19462월 서울 비상국민회의에 전남대표로 참석하는등 민족 대표로써의 일을 하기도 하였다.

김구와의 일화가 있는데 1948년 광주를 찾은 김구는 103일 무등산을 찾아 최흥종과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휘호와 노자의 <도덕경>의 구절을 보내는 등 최흥종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었다.

 

사회운동가로써 나환자를 위한 활동을 펼쳤는데 양림동에 나환자 진료소 설립을 위해 자신의 땅 1천 평을 기증하고 '광주나병원'을 세웠다.

1932년 김병로, 송진우, 조만식 등과 '조선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한 뒤 그들의 치료와 생계대책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하였으나 무시당하자 150여명의 나환자들과 함께 광주를 출발하여 경성까지 걸어가는 구라대행진과 연좌농성을 함으로써 소록도에 나환자의 수용시설이 만들어졌다.

 

 

오방최흥종 기념관

광주 남구 제중로 64 오방최흥종기념관 (사직도서관 근처)

매주 화요일 ~ 일요일 9:00~18:00 운영

매주 월요일 및 국경일, 명절 연휴

 

소감

오방최흥종이라는 이름을 이번 활동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 활동을 하며 교과서에서 배웠던 국채보상운동,신간회,건국준비위원회등 알고 있었던 단체들이 나왔으나 광주에서 나병환자와 빈민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활동하였던 최흥종이라는 사람을 알지 못하였고 교과서나 역사자료에서도 처음 접하게 되어 보훈인물에 대한 홍보와 인식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광주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목사로써,사회운동가로써,독립운동가로써 노력하였던 광주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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